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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유적 | 비셰흐라드(Vysehrad)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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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04-02-21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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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와 중세 초기의 비셰흐라드

자세히 보시려면 그림을 클릭하세요..    비셰흐라드는 아마도 체코인들의 민족적 정체성이 가장 잘 담겨있는 유적 중 하나일 것이다. 이곳은 초기 프제미슬리드 통치시대 때의 체코 민족의 기원에 관한 전설과 관련 있는 곳인데 연대기 기록자인 코스마스Cosmas에 따르면 그 당시에 이미 비셰흐라드라고 불리웠으며 (그 첫 번째 이름은 크라스텐이었다) 성의 초기 역사는 체코 아마존 전쟁시대까지 소급된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연대기적 발굴에 의하면 비셰흐라드 프라하성 보다 약간은 후대의 것이며 그 역사는 10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블타방과 보띠츠강의 합류점을 아래로 두는 바위언덕 위의 전략적인 위치는 선사시대 이래로 사람들이 정착하기에 더 없이 훌륭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 곳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가장 오래된 흔적은 기원전 3천 년 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석기시대 후반부터 이곳은 프라하의 가장 중요한 지역가운데 하나였다. 물론 이 시기에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슬라브인들이었다는 증거는 발견할 수 없고 따라서 프제미슬리드가의 통치가 있었다는 것도 주장할 수는 없다. 오랜 시간동안 비셰흐라드에 관한 언급은 문서로 남겨지지 않았고 10세기부터 전해져 오는 성 바츨라프나 성 루드밀라의 전설에서도 비셰흐라드의 이야기는 나타나지 않는다. 비셰흐라드의 존재를 증명해 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증거는 볼레슬라브 2세(967-999) 때 주조된 동전이다. 그 당시 비셰흐라드는 성 안 광장의 서쪽 편에 왕궁이 있고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집들이 있었으며 또 견고한 성벽이 둘러싸여 있는 전형적인 프제미슬리드가의 요새였다. 최근 발견된 전-로마네스크 양식의 십자모양의 오토니안 교회는 성 로렌스 바실리카 아래에서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남아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왕궁에는 성 클레멘트 교회나 세요한교회와 같은 가장 초기의 교회당들이 있었다. 우리는 지금 성 클레멘트 교회가 어디에 위치해 있었고 또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9세기의 슬라브 정착지들의 유적의 모습을 통해 추측해 볼 수는 있다.
    얼마 되지 않는 정보를 가지고 알 수 있는 사실은 폴란드의 침입이 있었던 1000년 경 볼레슬라브 왕 때에 비셰흐라드가 프제미슬리드 왕조의 심장부였고 11세기 말에 비셰흐라드는 후에 보헤미아의 초대 왕이 된 브라티슬라브 2세(1061-1092)의 거처가 되었는 데 그는 이곳에 왕궁을 건립하였고 성베드로와 바울 성당, 그리고 chapter house성당참사회 회의소를 세웠다는 것이다. 1070년에 구성된 참사회는 로마교회로부터 직접적으로 조정을 받았다. 왕궁이 있었던 아크로폴리스는 성벽과 해자에 의해서 성안의 다른 건물들과 분리되어 있었다. 이 성채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것은 회반죽으로 접착된 돌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며 원래의 방어벽을 대체한 것이었다. 브라티슬라브 2세(1061-1092 그 자신 역시 이곳에 묻혔다)의 통치기간인 1070년부터 소볘슬라브 1세(1125-1140)때까지 70년 동안 비셰흐라드는 프제미슬리드家 군주들의 거처로 쓰였다. 소볘슬라브 1세의 통치 마지막 시기에 프라하성의 왕궁과 성벽의 대대적인 개축이 착수되면서 그는 거처를 프라하 성으로 옮기게 된다.
    프제미슬리드가 통치시대 때의 유물로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참사회의소와 옛 왕궁터에 있었던 성 베드로와 바울성당을 연결해 주었던 교각인데 지금의 성 베드로와 바울성당 옆의 공원 북쪽에 그 잔해를 볼 수 있고 또 하나의 완벽하게 보존된 유물은 브라티슬라브 왕에 의해 건립된 성 마틴 로툰다이다. 1130년에 성 막달라 마리아와 성 마가렛을 위해 교회가 세워졌다는 언급이 있긴 하지만 그 밖의 우리가 알 수 있는 다른 교회건물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13세기 중엽 이후 군주들의 주요 거처로서의 역할을 상실한 후부터 까렐 4세 때 그 옛 영광을 되찾을 때까지 비셰흐라드는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점차 폐허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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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렐 4세 통치시대의 비셰흐라드

    까렐 4세의 즉위와 함께 비셰흐라드는 또 한번의 전성기를 맞는다. 자신의 선조인 보헤미아의 왕들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의미로 그는 옛 프제미슬리드 왕조 때의 전통들을 부활시키기를 원했으며 비셰흐라드에 새로운 목적과 기능을 부여했다. 그가 아직 모라비아 대공의 위치에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즉위를 앞두고 보헤미아 왕들이 가지게 될 대관예식을 재정비하고 있었는 데 그 중 하나가 대관식을 앞둔 앙 스스로 그 전날 비셰흐라드까지 순례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까렐 4세 자신이 1347년 9월 1일 비셰흐라드로의 순례 예식을 치른 첫 번째 왕이 되었다.
    까렐 4세는 그 당시 이미 몰락하여 폐허로 남아있던 비셰흐라드를 화려하고 장엄한 왕의 주거지로 바꾸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네스크 시대의 버려진 대지 위에 새로운 왕궁이 세워졌는데 그 왕궁은 성의 남동쪽에 모여 있던 건물들 가운데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1618년에 제작된 조각 작품에 이미 그 당시 왕궁은 높은 회랑이 있었던 파괴된 건물로 묘사되고 있고 2차 대전 이전에 실시되었던 조사에서 다른 건물들의 잔해는 물론, 왕궁의 기초부분도 발견되었다. 비셰흐라드는 1348년에서 1350년 사이에 진행된 성벽방어 시스템의 일부에 포함되었고 이 방어시스템은 총안이 있는 흉벽과 탑들 그리고 두 개의 출입구로 이루어져 있었는 데 그 출입구 중 하나였던 '슈삐츠까 Spicka'라는 이름의 전설적인 문은 대규모의 바로크식 성벽 방어 계획이 착수 되었던 17세기 중반까지 존속 되다가 다른 건축물들과 함께 사라졌다. 까렐 4세의 고딕식 성벽 방어 시스템 건설 계획은 상당한 규모로 진행되었는데 그 계획 속에는 일반적인 도시 건설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의 비셰흐라드 방어벽은 돌로 만들어졌고 신시가 성벽의 그것과 모습과 규모가 일치하는 것이었는데 그 성벽 사이에는 너비 7미터 이상의 장방형 탑들 15개가 60미터 간격으로 솟아 있었다. 새로 건축된 건물 중 가장 주요한 것은 왕궁이었는데 당시의 프라하 성의 왕궁만큼이나 멋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왕궁 안의 시종들의 거처가 지어졌고 수로가 축조되었으며 학교가 세워졌다.
    1346년에는 성 베드로와 바울 성당의 재건 작업이 착수되었고 그 때 두 개의 통로가 있는 오늘날의 교회 본당과 측면의 채플들 그리고 성가대석이 만들어졌다.
    그 후 수세기 동안 교회당은 조금씩 개축되다가 18세기초에 대대적인 변화를 갖게 된다. 1723년에서 1729년 사이에 이루어진 개축작업에서 교회 본당의 정면은 물결치는 듯한 바로크 양식으로 꾸며졌는데 이 건물은 1885년 요제프 모커 Josef Mocker에 의해 신고딕 양식의 지금의 교회당이 건립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1420년, 까렐 4세에 의해 건설된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이 성채는 그러나 그 후 일어났던 지그문트 왕과 후스파 교도들 사이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붕괴되어 버린다.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성 마틴 로툰다와 대학 교회가 보수되어 남아있는 것을 제외하고 다른 나머지의 교회 건물들은 이곳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병원 건물과 성모 마리아 교회도 사정은 같았다. 까렐 4세에 의해 회복되었던 비셰흐라드의 영광은 결국 그렇게 짧은 기간 밖에 지속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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