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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유적 | 비셰흐라드(Vysehrad)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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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04-02-21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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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비셰흐라드

vysehrad1.gif      1866년 프러시아 군대에 의한 오스트리아의 패배 후 비셰흐라드 성채는 폐쇄되었고 1883년엔 프라하 시에 편입되었으며 보헤미아의 찬란했던 시절을 말없이 보여주는 유적지가 되었다.
    이곳엔 1870년 에 새롭게 단장 된 국립묘지가 있는데  이것은 1660년부터 존재해 왔던 옛 묘지를 확장, 신축한 것이다. 개축사업은 당시 프라하 시장이었던 바츨라프 슈뚤쯔 Vaclav Stulc 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건축을 지휘 감독한 사람은 묘지의 남, 동쪽의 대리석 무덤을 만든 안토닌 바르비티우스 Antonin  Barvitius와 1902년에 완성된 북, 남쪽의 아케이드를 디자인 한 안토닌 위흘  Antonin  Wiehl이었다. 터스카닌 스타일의 기둥은 폼페이 벽화가 그려진 궁륭을 받치고 있다. 그리고 이 안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세계적인 체코의 음악가 안톤 드보르작  Anton Dvorak 과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Bedrilch Smetana 의 묘가 있으며 그 사이에 체코인들이 사랑했던 작가 까렐 챠뻬크 Karel Capek또한 고요히 잠들어 있다. 슬라빈 Slavin 이라고  이름 붙여진 묘지의 한 부분은 특별히 민족을 위해 살았던 인물들의 묘지이다. 이곳은 1889년에서 1893년 사이에 만들어졌는데 비셰흐라드의 사제장이었던 미꿀라쉬 까를라흐 Mikulas Karlach와 애국운동의 대표자였던 뻬뜨르 피셔 Petr  Fischer 두 사람의 발의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관 위에 앉아있는 날개 달린 수호천사와 양쪽 아래의 흐느끼는 두 여인의 조각은 1892년에서 1893년에  조각가인 요제프 마우더 Josef  Mauder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 조각 아래에는 44개의 관이 있는 거대한 지하실이 있다. 슬라빈으로 이어지는 작은 오솔길이 있는 0.8핵타르(00평)의 이 묘지는 체코의 중요한 예술인들과 과학자들의 무덤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묘비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척 수수한 느낌을 준다. 교회의 오른편-북쪽에는 1872-1874년 사이 요제프 니클라스 Josef Niklas에 의해 신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단층 짜리 신 사제장 관저(89번지)가 있다. 관저 내부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계단과 예배실인데 이곳은 현재 지역의회에서 관리하는 결혼 예식장으로 쓰이고 있으며 요제프 헬리흐 Josef Hellich가 그린 체코의 수호성인들의 그림으로 장식되어있다. 니클라스는 또한 1874년에서 1877년 사이에 지어진, 끄 로툰뎨 K rotunde거리의 90, 91 그리고 100번지 집인 전 사제 평의원집들도 역시 디자인했다. 이 집들은 현재 민족 유적지 비셰흐라드의 관리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비셰흐라드 성당 참사회의소는 또한 1848년과1849년에 얀 리뽀따 Jan Ripota에 의해 디자인된 81, 82번지 집들을 소유하고 있다.
    프라하를 통치했던 왕조의 그 첫 번째 거주지였으며 지금은 국가적 유적지가 된 비셰흐라드는 국가의식이 고취되던 여러 시대와 또한 오늘날까지도 체코의 문화에 많은 영감을 주는 곳이다. 그래서 역사적 유물들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증가되었고 비셰흐라드가 바로크식 성채로 변모한 이후 심하게 파손된 부분과 또한 완전히 파괴되어버린 부분들이 더 이상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한 많은 주의가 기울여 졌다. 비셰흐라드의 첫 번째 역사적 유물은 그 보존여부에 대해 강한 논쟁을 야기 시키다가 1841년 시의원이었던 까렐 호떽 Karel  Chotek의 중재로 남겨질 수 있었던 성 마틴 로툰다 st. Martin Rotunda이다. 그 때  신시가와 빤끄라츠 Pankrac ( 동시에 초기 바로크 양식의 벽돌문이 있는 북쪽편의 방어벽이 동시에 축조되었다 )를 연결 해 주는  새로운 길도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새로운 도로의 건설계획 때문에 로툰다를 파괴해야만 하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시의원 까렐 호떽이 도로건설 계획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함에 따라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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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로 오래된 종교건축은 1903년에 잔해가 발굴되어 유물로 보존되어 있는 성 로렌스 바실리카 sv. Lawrence's Basilica 이다. 하지만 비셰흐라드의 아크로 폴리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뭐니뭐니해도 성 베드로와 바울 성당 chapel church of SS. Peter and Paul이다. 1070년에 브라티슬라브2세에 의해 건립된 이 성당은 그 기초를 세울 당시 대공 스스로가 돌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12번이나 손수 날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성 베드로와 바울 성당은 오랜 시간에 걸쳐 개축되다가 1885년에서1887년 사이 크게 재정비 되었는데 건축가인 요제프 모커 Josef Mocker가 이성당의 외부를 전체적으로 새롭게 단장 할 때 르네상스와 바로크식의 부분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성당의 본당과 측랑을 다채색의 장식들로 덮게 되었다. 요제프 모커는 프라하 시내의 화약탑과 꾸뜨나 호라와 쁠젠의 여러 고딕 건축을 맡았던 건축가이며 까를슈테인 성과 크지보끌라드 성, 꼬노삐슈떼 성의 개축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성당의 가장 큰 변화는 1902년과 1903년의 대공사 때 일어나게 되었는데 모커조차도 존중하여 보존해 놓았던 바로크식 정문이 이 때 프란티쉑 믹슈 Frantisek Miks에의해 신고딕양식으로 바뀌게 되었고 지금의 종탑 두개도 이때 제작되었다.  성당의 정문은 1901년 슈떼빤 잘레샥 Stepan Zalesak 의 부조작품 " 최후의 심판"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프란티섹 Fantisek과 마리에 우르반 Marie  Urban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본당 제단과 오른편 통로에 잇는 목판화들도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다. 고딕시대 건축물들의 잔재들이 비셰흐라드 절벽 위에 조금 남아있다. 그것은 교각의 일부와 수비요새건물(리부셰의 욕장)의 외벽 일부, 그리고 다른 하나의 건물인데 이 건물은 1960년에 개축된 이후 비셰흐라드와 관련된 자료들을 전시하는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다. 빤끄라츠 방향으로 나가는 출구에 까를 4세 통치 때부터 있었던 슈삐츠까 문 Brana Spicka 의 잔해가 있는데 이것은 1684년 비셰흐라드 안에 바로크 요새가 건설될 때 해체되다가 남은 것이다.
    성 베드로와 바울성당의 남쪽 정원 안에는 옛 병기고 건물과 1889년과 1897년 사이에 요제프 바츨라프 미슬벡 Josef Vaclav Myslbek 에 의해 제작된 네 개의 거대한 조각상이 있다. 이 조각상들은 모두 체코 전설 속의 인물들인데 각각 루미르와 노래 Lumir and the Song , 자보이와 슬라보이 Zaboj and Slavoj , 쯔띠라드와 샤르까 Ctirad and Sarka 그리고 체코의 첫 왕조의 시조라고 알려져 있는 프제미슬과 리부셰 Premysl  and  Libuse이다.
    지금의 비셰흐라드는 관광객의 발길도 많이 닿지 않는 체코인들의 아늑한 휴식처가 되었고 한때 체코 왕권을 상징하는 웅장한 성채였던 과거의 모습과는 다르게  몇 채의 작은 건물들의 자취만이 남아있는 쇠락한 유적지이지만 지금까지도 모든 체코인에게 자긍심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민족 성지임에는 틀림없다.  언젠가 별빛이 밝은 여름밤에 블타바 강변 위에 있는 비셰흐라드의 여름극장에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체코 친구들과 스메타나의 '나의조국'을 들을 수 있다면 그건 무척 의미 있는 추억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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