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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유적 | 프라하 성(Prazsky hrad)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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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04-02-21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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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사람들은 블따바 강 위의 나즈막한 언덕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해 했다. 연대기학자 코스마스 Kosmas가 "돌고래의 등"이라고 비유하기도 했던 이 언덕 위에 프라하 성의 독특한 건물 군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프라하 성은 그 초기 때부터 정치, 행정적인 기능에서 뿐 아니라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국가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점차 높아지게 되었다.

프라하 성의 건립 : 프라하 성의 건립은 체코의 첫 왕조인 프르제미슬리드-당시에는 중부 보헤미아 지역만을 통치하고 있었던-의 역사와 직접 연결된다. 사실 프르제미슬리드 왕조 통치 초기 때에 보헤미아의 중심지는 프라하가 아닌 레비흐라데쯔였다. 지금의 프라하 북쪽 경계선(로스또끼 Roztoky의 위쪽)에 위치해 있었던 이곳은 블타바 강의 왼편 강둑 언덕 위에 세워진 요새화된 지역이었다.

870년경 대공 보르지보위(기록에 나타나는 첫 통치자)는 슬라브인들의 전도자로 여겨졌던 로마 교황 클리멘트 Kliment에게 봉헌된 보헤미아 최초의 교회를 이곳에 건립했다. 그는 대 모라비아 제국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자신의 거주지를 옮기게 되는데 그가 자신의 새로운 거처로 삼았던 블타바 강변의 굽어진 언덕이 바라 프라하라고 불리 우던 곳이었다. (최근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AD 850년경 이전부터 이미 사람들이 생활했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으며 통치자가 거주하기 시작함에 따라 큰 도시로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882-884년에 보르지보위는 이 언덕 위에 성모 마리아를 위해 봉헌된 보헤미아의 두 번째 교회를 건립하였고 그 옆에 자신의 궁을 건립하여 프라하 성의 기초를 닦았다.

당시 전형적인 중세 초기 요새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프라하 성은 그 후 성의 내부 구조나 외형이 많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터의 기본적인 형태는 지금까지 변함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 현재 프라하 성의 제 3 뜰과 성 이르지 수도원 자리에 있었던 대공의 목조 궁전이 그 때 프라하 성의 중심이었고 AD 900년 이후에는 5m 폭의 흙벽으로 둘러싸여졌으며 이 방어벽은 통나무 격자로 강화되었다.

로마네스크 이전 시대의 프라하 성 : 9세기 말부터 프라하 성은 당시 이미 견실한 국가 체제를 갖추어 나가고 있었던 프르제미슬리드 왕국의 중심지로서, 또한 체코 민족의 상징으로서 그 기능을 해 나가게 되었으며 이후 많은 통치자들의 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프라하성의 이런 특별한 위상은 동시에 부정적인 측면도 함께 내포하고 있었는데 야심을 가지고 왕위를 꿈꾸던 이들에게 성이 권력을 거머쥐게 되는 열쇠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왕조가 형성된 이후 200년간 프라하 성은 권력싸움의 위기 속에서 불안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프라하 성의 첫 석조 건축인 성모 마리아 교회 - 지금의 제 2, 제 4 뜰(나바스띠에 Na Baste 정원) 사이의 통로 옆 유리로 덮여 있는 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 - 가 건립된 후 또 하나의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그의 아들 바츨라프는 929년 성 비트를 위하여 로툰다를 건립하게 되는데 935년 그가 암살되어 그곳에 묻힌 후 보헤미아의 수호 성자가 되면서 이곳은 종교적인 중요성을 더해가게 된다. 973년 볼레슬라브 2세 때에 프라하에 주교좌가 설립되었고 그때 성 비트교회는 대성당으로 승격되었다(그 후 교회의 중요성은 프라하의 두 번째 주교였던 성 보이띠예흐의 유골이 그 곳에 묻혔을 때에도 크게 높아졌었다). 그리고 같은 해 베네딕트 교단에 의해 성 이르지 교회 옆에 보헤미아 최초의 수도원이 건립되었고 초대 수녀원장을 볼레슬라브 2세의 누이였던 믈라다가 맡게 되었다. 정치와 종교 간의 상호 협조관계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1002-1004년 사이 프라하 성은 볼레슬라브 2세의 아들들인 야로미르, 볼레슬라브 3세, 그리고 올드르지흐 세 형제간의 권력 싸움으로 인해 피로 물들게 된다. 형제 간의 싸움에서 발전된 갈등은 외부 권력을 끌어들이는 양상으로까지 발전되었는데 1003년엔 폴란드 왕 볼레슬라브 Boleslav the Brave가 성을 정복하였고 이듬해 황제 헨리 2세는 야로미르의 동의 하에 군사조정에 개입하기도 했다.

1014년 독일 황제 헨리 3세는 브르제티슬라브 Bretislav가 거주하고 있던 프라하 성을 포위하였다. 그는 목재로 되어있던 성의 방어시스템을 방화하고 브르제티슬라브의 항복을 강요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성벽은 석재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로마네스크 시대의 프라하 성 : 1070년 이후 프라하의 통치자들은 그들의 거주지를 비셰흐라드로 옮기게 된다. 그 첫 번째 왕은 브라티슬라브 2세 Bratislav 2였는데 그가 거처를 옮기기로 결심한 것은 자신의 동생이었던 주교 야로미르와의 논의를 거친 결과였다. 하지만 국가의 핵심으로서 프라하 성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비셰흐라드의 성 베드로와 바울 성당이 건립됨과 동시에 브라티슬라브의 동생 스삐띠흐녜프 2세 Spytihnev 2에 의해 새로운 바실리카 예배당이 성 비트 로툰다 자리에 1096년 새롭게 건립되었다. 성 비트 바실리카의 완공은 12세기 초에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새로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등장으로 간주된다. 1135년 소볘슬라브 1세 Sobeslav 1는 “라틴 도시 스타일에 따라” 프라하 성을 확장,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프라하 성의 중심부와 동쪽 부분을 포괄하여 둘러싸는 새로운 방어벽을 (석회를 이용하여) 구축하였다. 벽은 매우 높게 쌓여졌고 (그 일부분은 높이가 14m나 되었다) 벽의 남쪽 부분은 여러 개의 탑들로 강화되어 있었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독특한 방어체제의 요소들이었다. 성의 입구는 세 개의 탑으로 방어되었다. 남서쪽의 백탑, 왕궁을 접하고 있었던 남탑, 동쪽 문으로 통하는 통로와 연결되어 있었던 흑탑의 세 개가 그것들이었다.

소볘슬라브의 아들 블라디슬라브 2세는 1140년 자신의 거처를 비셰흐라드에서 프라하 성으로 다시 옮기게 된다. 새로운 방어벽은 곧바로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는데 1142년, 성이 즈노이모 Znojmo의 대공 꼰라드 Konrad에 의해 5주간 포위되었기 때문이다. 성은 함락되지 않았으나 성벽은 방화로 인해 심하게 손상되었는데 그 후 성의 확장 개축 공사가 또 한번 이루어지게 된다. 12세기 말 프르제미슬리드 왕조는 왕권 다툼으로 인한 크나 큰 위기를 겪게 된다.

1178년에서 1193년까지 프라하 성은 여섯 차례나 전투의 장이 되어야 했으며 1197년에 이르러서야 블라디슬라브 인드르지흐 Vladislav Jindrich가 자신의 통치권을 형 프르제미슬 오타카르 1세 Premysl Otakar 1에게 넘겨 주면서 평화와 번영의 시기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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