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성(Prazsky hrad) 2 > 나눔터가 드리는 생활정보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Korea: 2019-06-26 17:05:21 / Czech: 2019-06-26 10:05:21 / (시차: 7 시간)

나눔터가 드리는 생활정보

프라하의 유적 | 프라하 성(Prazsky hrad) 2

페이지 정보

등록일: 04-02-21 07:47

본문

 

마지막 프제미슬리드 통치자들 시대의 프라하 성 : 13세기 전반까지 프라하성은 소비예슬라프대공 (Prince Sobeslav)에 의해 건축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보헤미아에는  1340년대 이후에야 적용되기 시작했던 고딕양식이 그때까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1248년 귀족들은 바츨라프 1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을 주도한 것은 후에 프제미슬 오타카르 2세가 되는 그의 아들이었는데 그는 성을 본거지로 삼고 있었지만 결국 성이 포위되자 식수의 부족으로 항복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다행히도 분쟁은 화해로 매듭지어졌고 1253년 프제미슬 오타카르 2세는 ( 바츨라프 1세의 공동 통치자로서) 왕궁의 재건에 착수하게 된다.  일년 후, 보헤미아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그는 성벽을 재건, 확장하는 대대적인 작업을 시작했는데 성벽의 남쪽 부분은 새롭게 건설된 소지구와 연결되었다.

 프제미슬 오타카르 2세 이후 1278년에서 1283년 까지 보헤미아는 프제미슬 왕조의 계승자인 바츨라프 2세 (Vaclav 2) 대신에 그의 후견인인 브란덴부르크의 오타(the Margrave Ota of Brandenburg)의 통치를 받았다. - 사실상 통치라기 보다는 착취에 가까왔다. 1280년에 성은 폭풍과 홍수로 인한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탑의 지붕 목재들이 쓸려 나갔고 북쪽 성벽과 성 조지 수녀원, 그리고 성 비트성당의 참사회의장이 큰 손상을 입었다. 바츨라프 2세의 평화롭고 오랜 통치기간동안에 성은 다시 보수되었고 그 문화적 가치의 절정기를 맞았다. 하지만 바츨라프 2세의 통치 말년인 1303년에 일어난 화재는 왕궁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 화재는 그 후 이어질 불길한 시대에 대한 전조였는지도 모른다. 1305년 왕은 숨을 거두었고 1년 후에는 왕권을 계승받았던 그의 아들 바츨라프 3세가 올로모우츠 Olomouc 에서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프제미슬리드왕조는 결국 부계의 맥이 끊겨버린 셈이었다.

 룩셈부르크왕조 통치시대의 프라하 성 : 마지막 프제미슬리드왕조의 통치자였던 바츨라프 3세 (Vaclav 3)의 암살 이후 프라하성은 쇠락해갔고 몇 차례의 위험을 겪게된다.  1306년에 케르텐의 헨리(Henry of Karten )가 왕권을 이어받았으나 같은 해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Rudolf of Hapsburg)가 통치권을  다가 그가 죽고 난 뒤, 1307년에 케르텐의 헨리가 다시 왕권을 쥐게되었다. 그 후 1310년에 헨리 7세 황제의 아들인 룩셈부르크가의 얀 (John of Luxemburg) 이 왕위를 잇게 된다. 얀 왕의 통치시대에도 성은 계속 쇠락해 갔다.

그는 기사적이었고 또한 탁월한 외교적 수완을 가지고 수많은 원정에서 보헤미아의 명성을 날리기도 했지만 그가 집으로 귀환하는 것은 주로 더 큰 사업을 위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4세기의 처음 30년 동안에 있었던 유일한 변화는 1321년에 있었던 성 지역(Hracany)의 건설이었다. 흐랏챠니의 성벽은 프라하 성과 소지구의 방어 시스템과 연결되었다.  1333년 10월에 얀 왕과 프제미슬리드가문의 공주 엘리슈까 (Eliska)의 아들, 즉 후에 까렐 4세 황제가되는 까렐대공이 프라하에 왔을 때 그는 성이 매우 황폐해져 있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당분간 구시가에서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곧 성으로 거처를 옮기고 왕궁을 확장, 재건하기 시작했다. 1344년 그의 아버지 얀왕이 참석한 가운데 성 비트 대성당의 초석이 놓였는데 이 성당이 건축되면서 그 자리에 있던 옛 로마네스크 바실리카는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아라스의 마티아스 (Master Mathias of Arras) 와 뻬뜨르 빠를레슈 (Petr Parler) 에 의해 만들어진 이 성당은 프라하 성과 전도시를 특징지우는 대표적인 건축물이 될 것이었다. 또한 로마네스크 왕궁 채플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모든 성인들의 교회역시 훌륭한 고딕 건축물이었다.  이러한 건축물들과 그 외의 몇 가지 첨가 부분들로 까렐 4세의 프라하 성은 위엄 있는 황제의 거처가 될 수 있었다. 그는 방어벽에 대해서는 비교적 적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소지구 반대편인 성의 남쪽에 새로운 해자와 해자 벽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다소 더디게 진행되긴 했지만 바츨라프 4세의 통치기간 중에도 작업은 계속되었다. 대성당의 건축이 계속되었고 왕궁이 증축되었다.

1419년 왕이 죽은 후, 그리고 후스전쟁이 일어난 1420년 이후에 공사는 중단되었다. 1421년부터 전쟁이 끝난 1434년 까지 성은 프라하의 후스파의 수중에 있었다. 후스파와 대립하고 있었던 바출라프 4세의 동생 지그문트 (Zikmund) 는 비뜨꼬프 (Vitkov)전투에서 패배한 후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 계속 보헤미아의 지배권을 주장했으나 1425년에서 1427년 사이 잠시 지그문트의 군대에게 접수되었던 때를 제외하고는 후스파에게 성을 내어줄 수 밖에 없었다.

고딕시대의 프라하 성 : 후스전쟁이 끝난 이후 체코의 통치자들인 황제 지그문트 (Emperor Zikmund of Luxemburg), 합스부르크가의 알브레히트 2세 (King Albrecht 2 of Hapsburg), 포스트후무스가의 라디슬라브 (Ladislav the Posthumous) , 뽀졔브라디가의 이지 (Jiri of Podebrady), 야겔론가의 블라디슬라프 (Vladislav Jagellon)는 구시가의 왕궁(지금의 시민회관 - 오베쯔니 둠 Obecni dum - 자리에 있었던 )에서 거주해야 했고 성은 버려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1483년 프라하 시내에 전염병이 돌자 블라디슬라프왕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성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는 성을 후기 고딕스타일로 재건했는데 그것은 건물의 사무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왕의 거주지로서의 편의성도 강조하는 건축방식이었다. 당시 유능한 건축가였던 베네딕트 라이트 (Benedikt Reid)가 공사를 담당했는데 그의 첫번째 임무는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라이드의 작업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 한 것은 왕궁의 개축이었다.

특히 로마네스크 양식의 까를 4세의 방 위에 건축한 블라디슬라프 홀 (Vladislav Hall)은 당시 중부 유럽에서 교회건축물이 아닌 일반 건축물로서는 가장 큰 홀을 가진 것이기도 했다. 또한 홀과 연결되어 있는 `기수의 계단`은 후기 고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블라디슬라프 홀의 창문들과 왕궁 벽날개부분 ('루드빅-Ludvík'이라고 불리우는)의 르네상스식 건축기법들이 라이트의 작업을 통해 나타나기 시작한 것들이며 그것은 보헤미아에 처음으로 소개된 새로운 스타일의 건축양식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프라하성의 모습은 주변의 건물들이 지어짐으로써 완성된다. 이 건물들은 대개 귀족들 소유의 궁전들이거나 교회의 부속 건물들, 관공서와 같은 것들이었다.

왕궁을 따라 성벽의 남동쪽 부분에 지어진 궁전들은 슈밤베르끄가 (Svamberk)와 로즈미딸가 (Rozmital), 그리고 로즘베르끄가 (Rozmberk)에서 소유했던 건물들이었고 백탑 옆의 서쪽 출구쪽에는 성 수비대장의 저택이 건축되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인터넷 나눔터 SINCE 1999 관리: 예창열 / 이현우